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틴 하이데거 (문단 편집) === 대학생 시절 === 그렇다고 성직자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하이데거는 1909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신학과에 입학해서 겨울학기부터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이런 선택을 한 것은 경제적 이유에서였을 수도 있다. 그의 장학금은 신학 공부를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45] 어쨌든 하이데거는 이곳에서 평생 "스승"이라 부를 카를 브라이크(Carl Braig)를 만난다. 브라이크는 반모더니즘 신학자 중 한 사람이으로서 『존재에 관하여. 존재론 개요』를 저술한 사람이다. 하이데거는 이 책을 통해 전통적 존재론의 몇 가지 기본 개념을 숙달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젊은 하이데거는 전통과 규율을 중시하며, 당대의 급속한 변화와 순간적인 자극을 추구하는 경향을 데카당스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흔했던 보수적 문화 비판이었다. 사실 하이데거는 이보다 앞서 1907년에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의 박사 논문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존재자의 다양한 의미에 대하여」를 봤었고 이때부터 존재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브랜타노에 따르면 표상이란 순수하게 내적인 무엇이 아니며 언제나 '어떤 것'의 표상이다. 그리고 그 '어떤 것'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개별 사물 ㅡ 낱낱의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랑 자체는 없으며, 사랑의 수많은 개별 사건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브렌타노는 개념적 사물들에 그 어떤 실체를 부여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이데거의 연구는 브렌타노를 거쳐 [[에드문트 후설|후설]]에 이른다. 후설의 『논리 연구』는 하이데거의 개인적 숭배서가 되었다. 그는 대학 도서관에서 빌린 이 책을 2년 동안 자기 방에 놓아두었는데, 그 사이 이 책의 대출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은 하이데거에게 만큼은 범상치 않은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자연과학의 발달은 철학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고 했다. 그들은 철학적 논리라는 것도 '주관 심리 내의 자연적 사건'에 불과한 것이기에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후설의 반박은 논리의 심리적 과정은 심리적 행위에 속하지만 그 논리의 결과는 심리적 행위와 무관하게 결론을 낼 수 있기 때문에, 논리학이 심리적 행위에서 출발했음에도 논리는 그 유효성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 후설의 주장이었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하이데거는 자신의 최초 논문 「논리학에 관한 최근 연구들(1912)」에서 심리적인 것은 논리적인 것의 "운용을 위한 토대"라고 말했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지 3학기가 지났을 때 그의 심장에 다시 이상이 나타났다. 하이데거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몇 주간 완전한 휴식을 취하려고 1911년 여름, 메스키르히로 돌아왔다. 아마도 과로한 탓이겠지만, 어쩌면 그릇된 공부에 대한 신체의 저항일지도 몰랐다.[* 하이데거 전기 작가 뤼디거 자프란스키는 [[신체화 장애]](psychosomaticism), 즉 불안과 같은 심리적 증상이 신체적 반응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고 있다. 이는 신체적, 생리적 기능이 손상된 것이 아닌데도 불안, 두려움, 공포, 분노, 슬픔 등의 부정적 정서로 인해 근육통, 두통, 과민성 대장 증상, 비궤양성 소화불량, 만성피로, 호흡곤란, 건강염려증 등의 신체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신학보다는 철학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고 마음속으로는 이미 교회를 등지기 시작했지만 장학금 때문에 한동안 교회에 의존할 수밖에 없던 처지였다. 하이데거는 힘든 고민 끝에 신학을 포기하고 철학에 집중하기로 결심한다. 성직자가 되지는 않더라도 가톨릭 철학자로서 경력을 착실히 쌓아나간다면 철학을 공부해도 장학금을 받으면서 생활할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심지어 교사가 되는 것까지 염두에 두며 곧 있을 겨울학기에 수학과 물리학 및 화학 과목을 등록했다. 물론 그러면서 철학과에서의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13년 하이데거는 지도교수 아르투어 슈나이더(Arthur Schneider) 밑에서 논문 「심리학주의에서 판단의 이론」을 쓴다. 그는 이 논문으로 철학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이어서 교수자격 논문을 준비하던 중,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하이데거는 10월에 소집됐지만 심장병으로 인해 '제한적 복무'로 판정 받고 징집 유예 처분이 됐다. 그는 다시 논문 작업에 열중한다. 원래 하이데거는 '수 개념의 본질'을 연구하려고 했으나, 그 과정에서 [[둔스 스코투스]]의 텍스트[* 하이데거 시대에 둔스 스코투스의 저작으로 간주되었던 「의미의 양태에 관하여」라는 이름을 가진 이 텍스트는 최근 들어서 둔스 스코투스 학파의 철학자인 토마스 폰 에어푸르트의 저작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113)]를 만났다. 둔스 스코투스에 따르면, 개개 사물이란 시간과 공간의 특정 지점에서 일회적인 무엇이다. 이런 개별자를 "하이케이타스(haecceitas)"라 부른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사물들의 '이haec ㅡ 지금ce ㅡ 여기 있음itas', 즉 '지금 여기 이것'을 뜻한다. 그것은 일회적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 바뀜에 따라 무한한 개별성으로 드러날 수 있다. 그것은 자체 소진될 수 없는 풍요로움이다. 단일 의미로만 사용되는 개념으로는 이러한 현실의 풍요로움을 충분히 나타낼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독특한 의미 역동성을 지닌 '생동적 언술'만이 그러한 근본 구조를 나타낼 수 있다. 이 같은 생각을 적은 교수자격 논문 「둔스 스코투스의 범주론과 의미론」을 지도교수 하인리히 리케르트에게 제출했고, 하이데거는 1915년 교수자격 심사에 통과했다. 교수자격 논문을 마친 하이데거는 다시 한번 군에 소집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심장 질환의 징후가 나타난다. 1915년 가을, 그는 바덴 주 뮐하임 군병원에 4주간 입원하며, 그 후 예비 전력인 국민군의 일원으로 프라이부르크 우편물 검열국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적국이나 중립국을 왕래하는 수상한 우편물을 검열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는데, 보통 징용된 여자들이나 전투 능력이 없는 남자들이 근무하는 곳이다. 하이데거는 비교적 여유가 있는 이곳에서 1918년 초까지 복무하며 남는 시간은 학문에 쏟아붓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